[변동식 교수] 草溪卞氏 '聞慶미르물 世居'의 유래 및 지락헌(至樂軒), 사효재,문경변동식가옥 설명

변상범 기자 | 기사입력 2024/07/14 [14:30]

[변동식 교수] 草溪卞氏 '聞慶미르물 世居'의 유래 및 지락헌(至樂軒), 사효재,문경변동식가옥 설명

변상범 기자 | 입력 : 2024/07/14 [14:30]

 

 

 

[코리아투데이뉴스] 14일 오전 '제1회 초계변씨 제학공파 수련회'에 참석한 후손들이 '문경변동식가옥(경북 문화재 482호)'에 방문한 자리에서 변동식(행정학 박사/문경대학교) 교수는 초계변씨 제학공파 문경종회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.

 

변 교수 설명에 의하면, 초계(草溪) 변씨(卞氏)는 시조 변정실(卞庭實) 공이 고려 성종(재위 981-997) 때 득관(得貫)한 이래, 400여년간 대대로 문하시중, 문하평리 등 권문세족의 지위를 누렸고, 고려 말에 8세손 변빈(卞빈) 공은 두문동 72현으로서 충절을 지켰다.

 

9세손 변남룡(卞南龍) 공은 조선 태조(재위 1392~1398) 때 한성판윤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, 왕자의 난 등을 겪으면서 태종(재위 1400~1418)의 미움을 받아 멸문지화를 입었다. 10세손 변효문(卞孝文)(1396~1461) 공은 세종(재위 1418~1450)의 인재등용으로 고관대작의 지위에 올라 영화를 누렸다.

 

11세손 변흠(卞欽, 1420~1495) 공은 세조(재위 1455~1468) 때 잠시 진잠(鎭岑, 현 大田 유성구)현감을 지내다가, 계유정난 등을 거치면서 당시의 혼탁한 정치관료 사회를 벗어나고자 관직을 버리고, 15세기 중엽(1460년 경)에 직산(稷山, 현 天安)에서 산수 좋은 상주(尙州 현 聞慶) 산양(山陽)으로 내려왔다. 영강(潁江) 변 반암(盤巖)에 지락헌(至樂軒)을 짓고 남쪽으로 징파루(澄波樓), 동쪽으로 광원대(曠遠臺)를 세워 자연을 벗 삼아 채수(蔡壽), 홍귀달(洪貴達) 선생 등과 교유하며 시와 학문, 그리고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.

 

13세손 변안인(卞安仁, 1473~1535) 공은 16세기 초엽(1510년 경)에 영강이 홍수로 범람하자 우물이 특히 좋은 이곳, 미르물로 이주하고, 변종번(卞宗番), 변종범(卞宗範), 황사웅(黃士雄), 서흔(徐訢) 선생 등과 함께 산양수계(山陽修楔)를 조직하여 산양 현리에 취회소(聚會所)를 두고 학문과 미풍양속을 장려하였다. 이는 서당(죽림서당-근암서당-영빈서당)의 기반이 되어 지역교육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, 후손들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며 510여 년간 전통을 존중하면서 교육과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국가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며 대대로 복된 삶을 누렸다.

 

임진왜란(1592~1598)이나 구한말(1897~1910) 외세침탈의 시기에는 구국 의병항쟁에 참여하기도 하였고, 일제강점기(1910~1945)를 거쳐 정부수립(1948)이후에도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(1950~1953)의 아픈 역사를 함께 겪었다. 1960년대의 새마을사업을 거쳐 70년대부터의 산업화, 도시화 과정에서 후손들이 대부분 서울, 대구 등 도시로 이주하였읍니다. 한때 미르물에만 40여 호의 가구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불과 10여 호가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.

 

입향조 변이흠 공의 2대손, 용담 안인(1473~1535년) 공은 영강 변 반암의 지락헌에서 출생하였으나, 16세기 초반(1510년 경)에 영강이 홍수로 번람하자 반암에서 우물이 특히 좋은 미트물로 이주 하였고, 그 후 자손대대로 이곳에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. 

 

이렇게 변동식 교수는 "오늘 전국에서 초계변씨 제학공파 후손들과 대종회 및 연안공파 등 많은 분들이   문경을 찾아줘서 고맙다"며 "같은 후손으로 문경에서 초계변씨 집성촌과 문화재 가옥, 사효재, 지락헌 등

제학공파 문경종회 곳곳을 방문하고 공유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반갑다"라고 했다.

 

△사효재(문경시 호계면 구산리125)

일문경 입향조 지락헌(至樂軒) 변이흠 공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. 원래 1585년에 공의 묘소 아래에 창건하였으나, 퇴락하여 1921년에 24세손 우현 영보(18853~1924) 공 등 후손들이 현재의 위치로 장소를 옮겨 중건하였고, 1921년에 현재의 건물을 건립하였으며 195년에 다시 중수하였다. 약 247평의 대지에 면적 약 11평의 건축물로서 정면 4칸, 측면 1.5칸의 -자형 팔작 기와집이다.

 

△지락헌(至樂軒문경시 호계면 봉서리322-1)

문경 입향조 변이흠(1420~1495) 공이 건립한 정자이다. 공은 1460년 경에 직산에서 산양(山陽)으로 이주하여 140년경에 영강(潁江) 옆 반암(盤巖)에 집을 지어 지락헌(至樂軒)이란 현판을 걸고 남쪽으로 징파루(澄波樓), 동쪽으로 광원대(曠遠臺)를 지워 자연을 벗 삼고 당대의 공신 나재, 채수(蔡壽), 홍귀달(洪貴達) 선생 등과 교유하면서 시와 학문, 그리고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. 그러나 세월의 벽을 넘지 못하고 퇴락하였는데, 1935년에 26세손 춘강, 종헌(1902~1948) 공 등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옛터에 지락헌(至樂軒)을 중건하였고 1997년에 중수하였으며, 유허비도 건립하였다. 약 1평의 대지에 면적 약 9평의 건축물로서 정면 3칸, 측면 1.5칸의 규모이다. 팔작 지붕에 겹처마의 -자형 익공식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.

 

△문경(聞慶)미르물 세거비(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158)

규문경 입향 560년, 미르물 세거 510년의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에 미르물 연못 변에 세운 세거비이다. 이는 26세손 탁(1938~2019) 공 남매의 헌성금으로 세우게 되었다. 입향조 변이흠 공의 2대손 용담 안인(1473~1535) 공은 영강(潁江) 변 반암(盤巖)의 사효재에서 출생하였으나, 16세기 초반(1510년 경)에 영강(潁江)이 홍수로 범람하자 반암(盤巖)에서 우물이 특히 좋은 미르물로 이주 하였고, 그 후 자손대대로 이곳에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.

 

문경변동식가옥(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118-1)

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현 소유자 변동식의 증조부인 변봉규(1882~1951) 공이 아드님 변종태(1905~1966) 공과 함께 건립한 "ㄷ자형"의 전통 목조 가옥이다. 정면 6칸, 측면 4.5칸의 약 33평 한옥으로서 2005년 6월 2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82호로 지정, 보수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. 전체적으로는 전통 목구조수법에 따르면서 일부에 유리 창문과 좁은 통로, 볼트 너트 접합 등과 같은 근대 건축의 양식을 접목하고 있고,  원래 이 가옥은 "ㅁ자형"으로 3칸의 대문채도 있었으나, 문화재 지정 이전에 지락헌으로 이축되었다.

  

 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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